조문희의 뒷북

식량위기를 말할 때 내가 다루고 싶은 불평등 - <바나나 제국의 몰락>, 롭 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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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위기를 말할 때 내가 다루고 싶은 불평등 - <바나나 제국의 몰락>, 롭 던

moony1217 2019. 3. 24. 14:48

  '카사바'라는 작물이 있다. 길쭉한 고구마처럼 생긴 덩이뿌리 식물로, 아프리카 대부분의 지역과 동남아시아 일부 국가 사람들의 주식이다. 한국의 쌀, 유럽의 밀처럼 단위 재배면적당 공급 열량이 높은 작물이어서다. 나이지리아에선 이를 갈아 전분으로 만든 후 양념간을 하는데, 한국의 밥처럼 '푸푸'라고 불리며 사랑받는다.

  이 카사바 때문에 5억 명이 죽을 뻔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카사바 종 전체가 병충해 때문에 사라질 뻔했는데 카사바 하나에 의지해 생활을 꾸리던 사람의 수가 5억이었다. 2019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세계 인구는 대략 77억명. 5억이라면 단숨에 중요성을 획득할 만큼 큰 숫자다. 하지만 전혀 몰랐다. 카사바 자체도 들어본 적 없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1845년의 아일랜드 대기근. 감자를 주식으로 삼던 아일랜드 국민들이 감자마름병의 습격에 100만명 이상 굶어 죽은 사건이다. 인명을 숫자로 비교할 순 없다지만, 100만명 대 5억이다. 사태의 심각성만 놓고 본다면 한번쯤은 카사바 이야기를 접해봤어야 정상 아닐까. 

 

<바나나 제국의 몰락>, 롭 던. 직접 촬영.

 

  감자, 바나나, 카사바 등 현생 인류가 주로 소비하는 식량의 장기지속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책이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교 응용생태학과 교수이자 덴마크자연사박물관 소속 연구원인 롭 던의 <바나나 제국의 몰락>이다. 롭 던에 따르면 그 심각성에 비해 식량위기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주제다. 오히려 언론이나 학자들이 조명하는 식량은 지속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지는 영역에 가깝다. 먹을 게 넘쳐서 소나 돼지의 여물로 쓰고, 비만이 사회적 걱정거리인 시대 아닌가.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며 맬서스가 우울하게 중얼거리던 2백년 전에 비하면 상전벽해 수준이다. 일부 학자가 식량 위기를 경고하지만, 체감상 식량은 위기보다는 풍요와 더 가까운 단어다. 

  저자 롭 던은 그 성공이 바로 실패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생산성을 높이도록 변화한 결과 식량생산 구조 전체가 작은 위기에도 취약한 형태를 갖게 됐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는 핵심은 종 단일화다. 바나나A와 바나나B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A는 껍질을 닦아내주기만 해도 잘 자란다. 다 크면 맛도 좋고 크기까지 크다. B는 풀을 뽑아줘야 하는 등 자잘한 노동을 요구한다. 다 자라도 별 수확이 없다. 당연히 개별 생산자로선 A에 집중하는 게 우월전략, 모두가 A를 기르기 시작한다. 그러다 A에 병마가 찾아오면? 1950년대 대부분의 바나나 농장이 처했던 실제 사례다. 그로 미셸이라는 단일 품종에 집중하던 당대의 농가는 파나마병 한방에 작물을 모두 잃었다. 

  물론 지금도 바나나는 나온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먹는 바나나는 그로 미셸이 아닌 캐번디시라는 품종이다. 파나마병에 저항력을 가진 녀석이다보니 일단 살아남기는 했다. 문제는 파나마 병의 원인이었던 바나나덩굴쪼김병균이 새로운 계통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야 별 영향이 없다지만, 앞으로 캐번디시에 치명적인 병균이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애당초 병충해든 세균이든, 어떤 녀석이 특정 작물에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오는지 알기란 쉽지가 않다. 운이 좋아 하나를 피한다 해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이들 천적이 어떻게 진화해서 또 찾아올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위기는 끝나지 않는다. 새로운 형태로 시작될 뿐이다. 과학자로서 저자는 이를 요약해 겸허하게 말한다. "탈출은 잠시 뿐."

  책은 이렇게 식량위기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데 강점을 보이는 반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위기의 불균등 분포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다. 그나마 바나나는 사정이 낫다. 최소한 품종에 대한 연구라도 진행됐다는 점에서 말이다. 카사바는 사정이 다르다. 동북아의 작은 나라에 사는 내게 그랬거니와, 유럽 사람들에게도 카사바는 낯선 작물이었다. 5억 명의 목숨이 달린 식량이었음에도 그랬다. 만약 과학자 한스 헤렌이 카사바 연구에 세월을 바치지 않았더라면 어떤 결과가 생겼을까. 참고로, 카사바가 시드는 원인이 카사바가루깍지벌레라는 해충의 증가에 있음을 규명하고, 해충의 천적이 로페스기생벌이라는 것까지 알아낸 헤렌이 벌을 아프리카 지역에 방생하고자 3000만 달러를 요청했을 때 한 국제기구가 그녀에게 제공한 금액은 25만 달러였다. 그마저도 책에 따르면 동료 연구자들에게 '덜 중요한 연구에 돈을 준다'며 특혜라는 의혹을 받았다.

 

유엔 최초의 식량 특별조사관이자, 현 UN 인권위원회 자문위원인 장 지글러의 저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지만 나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의 핵심명제가 절반만 옳다고 본다. 남반구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나, 기아와 빈곤은 북반구의 일부 지역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절반'이 상징하는 현실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알라딘(aladin) 갈무리.

 

  여기까지는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 다음, 저자가 해충 연구와 박멸의 성과를 과학자 개인이 분투한 성과로 서술하는 데 있다. 운 좋게도 헤렌은 이후 한 단체로부터 600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받았고 예견된 비극을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어떨까.

  비극적이게도, 이렇게 위기는 관심받지 못하는 지역일수록 더 크게 닥친다. 흑인 밀집지역이 따로 있는 미국사회를 보면 이는 명료하다. 가난한 사람들은 주로 모여 사는데, 이들은 한 가지 종류의 작물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다양하고 신선한 식품을 접하면 좋겠지만, 영양보충이 급선무인 이들로서는 사치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거의 모든 미국인은 옥수수로 만들어진 음식을 주식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공통되다. 하지만 옥수수가 멸종한다면, 식량위기는 흑인에게만 온다. 부자 백인은 다른 작물로 만든 식품을 소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기 자체는 자연에서 도래할지 몰라도, 위기에 맞서는 역량의 부재는 사회에서 비롯한다.

  책이 서술을 멈춘 지점에서 내 고민은 시작된다. 설령 소수의 과학자가 사명감을 갖고 연구에 매진한다 해도, 자금은 결국 바깥에서 온다. 헤렌은 운이 좋았을 뿐, 개별 재단이나 기업의 지원이 매번 관심받지 못한 영역에 돈을 투자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저자가 공적 투자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하지만 투자의 결정여부와 규모는 결국 대중이 갖는 관심의 함수다. 비주류 영역에 왜 투자가 필요한가, 그 와중에서도 하필 취약계층과 지역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는 뭔가, 적절한 투자 규모는 얼마인가, 흔들리지 않는 연구 투자와 정책 패키지는 어떻게 만들 수 있나, 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연구자는 어떻게 대중과 소통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나름의 응답을 내어놓지 않는 한 해결은 난망하다. 물론 저자가 책을 쓴 동기를 두고 그런 커뮤니케이션을 위함이었노라 해석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책은 너무 많고, 대중은 더이상 충격받지 않는다. 지금은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을 썼던 시대가 아니다.

  그저 이런 문장에 희망을 걸어볼 수 밖에. "우리는 서서히 커져가는 비극을 무시한다. 다른 마을을 향해 천천히 불어나는 밀물은 외면하는 것이다. 하지만 열대작물 농사가 실패하여 생기는 비극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굶주림을 피해 난민이 몰려들 수도 있고 우리의 식량 공급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82~83p) '남의 일'이라 생각하는 한, 사람은 동정할 뿐 고민하지 않는다. 중요하지만 관심받지 못하는 주제를 다루는 사람일수록, '내 일'처럼 상상하게 만드는 능력이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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