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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희의 뒷북
읽는 것만이 책의 쓸모는 아니다. 과거 많은 가정에서 '세계문학전집'은 집을 장식하는 용도로 쓰였다. 꼭 읽지 않아도, 책은 자신의 관심이나 취향, 지적인 수준을 드러내는 기표가 된다. 실용적인 쓰임새도 있다. 지난 4월8일 조선일보는 라는 제목의 온라인 기사를 내보냈다. 당일 김진욱 공수처장은 '형법각론' 책을 들고 출근했는데, 1989년 초판 발간돼 수차례 개정된 책이라 현재의 법적 쟁점을 다루기에 적합치 않다는 것이다. 맞는 분석인지는 모르겠으나, 기자가 책을 어떤 용도로 인식하는지는 분명하다. 컵라면이었다면 '라면 불리는 데나 쓸 법한 책'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영화의 등장인물도 책을 다채롭게 이용한다. 책으로 사람을 때리고, 날아오는 총알이나 칼을 막는다. 책에 편지와 쪽지를 실어보내고, 암호나..
지금이야 다들 결말을 알게 됐지만 개봉 당시인 2009년만 해도 에서 주인공 둘이 끝내 헤어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적었다. '488'이란 글자가 연필로 쓰이듯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등장하면서 시작하는 영화의 첫 시퀀스는 어느 공원 벤치에 앉은 두 남녀의 모습으로 이뤄진다. 미국 LA의 스카이라인이 비치는 이곳에서 토마스 한센(조셉 고든 래빗)의 오른손 위로 썸머 핀(주이 디샤넬)이 왼손을 포갠다. 그녀의 왼손 약지엔 빛나는 반지가 끼워져 있다. 물론 해피엔딩의 예감은 잠시뿐이다. 오프닝에서 톰과 썸머로 짐작되는 소년과 소녀가 홈비디오 스타일의 영상으로 등장하고 나면, 영화는 멀쩡한 접시를 깨는 톰의 모습을 비춘다. "어떻게 된 건지 처음부터 말해봐." 동생 레이첼의 물음에 톰이 응답하면서 영화는 본론..
‘입좌파’라는 말을 글자로 읽는 것조차 싫어하는 나지만 친구들을 보며 꼭 한 번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대학교 2학년이던 2008년, 광화문 광장에선 소위 ‘광우병 집회’가 한창이었다. 광우병이 실재하는 질환이냐는 데 친구들은 저마다 생각이 달랐다. 누군가는 ‘그런 병 없다더라’고 말하는 반면 ‘입증됐다’고 소리 높이는 사람이 있었다. 혹자는 ‘그래도 시민이 불안해하면 일단 수입을 멈춰야하는 거 아니냐’며 제3의 길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모두가 동의하는 쟁점이 있었다. 적어도 집회에 나온 시민을 경찰이 폭력적으로 진압해서는 안 된다는 것. 불만을 토로하던 친구들은 네이트온에 삼삼오오 모였다. 네이트온은 지금으로 치면 카카오톡과 비슷한 메신저다. 그곳에서 단체채팅방을 연 우리는 짐짓 시..
대학 시절,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은 술자리에 모였다. 하릴없는 청춘이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이따금 카페에, 혹은 당구장에 가기도 했다. 노래방에 가는 날도 간혹 있었다. 하지만 매번 모임의 끝은 술집이었다. 무엇보다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곳에는 늘 고개를 끄덕여주는 사람이 있었다. 학교 얘기, 연예인 얘기, 그리고 이성 얘기…. 나처럼 술 한 잔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도 이야기의 세계에선 시민권이 있었다. 각자 만 원씩만 내면 배부르게 안주까지 먹을 수 있었다. 만 원의 행복 앞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했다. 그땐 몰랐다. 눈으로 보면서도 알지 못했다. 누군가는 오후 일과 내내 카페나 게임방에서 시간을 보낸 반면, 누군가는 알바를 마친 후에야 술자리에 ..
3년 전 대전의 고향 집 앞에서 나는 비명을 질렀다. “엄마!” 스물여덟 살 먹은 총각에겐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지만 그땐 어쩔 수가 없었다. 다급했으니까. 그때 나는 가족과 부여의 친척집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트렁크에는 사과, 한과, 김치 같은 할머니의 애정 어린 선물이 가득했다. 덕분에 어머니가 주차를 맡은 사이 아버지와 나는 짐을 옮기느라 바빴다. 양손 가득 짐을 들어도 차와 주차장 사이를 여러 차례 오가야 했다. 마침내 모든 짐이 쌓였고, 성질 급한 나는 상자 하나와 봉투 몇 개를 함께 손에든 채 아파트 현관의 자동문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문이 작동하지 않았다. ‘에이씨’, ‘뭐야’ 같은 추임새를 넣으며 닫힌 문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과거 그런 식으로 문을 열었던 기억이 있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