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희의 뒷북

디젤매니아라는 불편한 미래 - <지식의 착각>, 스티븐 슬로먼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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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젤매니아라는 불편한 미래 - <지식의 착각>, 스티븐 슬로먼

moony1217 2019. 3. 29. 21:57

 

  네이버에 '디젤매니아'라는 카페가 있다. 계절이 바뀌었으니 옷을 좀 사야겠다는 말에 친구가 권한 커뮤니티다. 쇼핑 후기와 추천을 통해 트렌드는 물론 상품의 질까지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는 공간이란다. 알고 보니 가입자가 무려 95만명이다. 업체가 제공하는 정보야 그렇다 쳐도 블로그 글이나 다른 카페의 후기보다 특별히 나은 점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더 상세하다, 실제 이용자들이다, 정모도 하더라, 몇 가지 근거를 꼽아보던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아무튼, 뭔가 달라."

   <지식의 착각>은 합리적일 줄 알았던 친구가 '아무튼'이란 말로 멈추는 지점을 설명하는 책이다. 저자인 스티븐 슬로먼 브라운대 교수에 따르면 "사람들은 놀랍도록 무지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무지하다." 화장실에서 매일 앉는 변기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도 알지 못할 지경이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인간이 복잡한 세상에서 얼추 잘 살아남는다는 점이다. 작동 메커니즘을 설명하진 못할지언정 인간은 변기를 쓰고 물을 내린다. 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가 지식공동체 속에 살기 때문이다."

 

<지식의 착각>에서 저자 스티븐 슬로먼은 인간을 '변기의 작동방식조차 제대로 모르는 존재'라는 식으로 묘사한다. 나는 인류에 대한 그의 정의에 정확히 부합하였다. 직접촬영.

 

  변기가 작동하는 원리는 애당초 단순하지 않다. 변기의 배수관은 거꾸로 된 U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눈에 보이는 휘어진 부분이 변기 속 수면보다 위쪽에 자리한다. 그렇지 않고 배수관이 일자형이라면 일상에서 보는 변기처럼 깨끗한 물이 고여있을 수 없다. 물은 본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볼일을 끝낸 인간이 스위치를 누를 때 비소로 변기의 물은 U자형 관에 압력으로 작용하면서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그리고 물탱크에서 본래 높이 만큼의 물이 변기로 내려온다. 기압에 대한 기초지식이 있어야 이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문송한 내게는 무리요, 물리학과 기계장치를 공부한 누군가가 문제없이 잘 만들었을 것이라 믿을 뿐이다.

   '믿음'이 핵심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개인이 정보를 기억하는 용량은 몹시 작다. 모든 분야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성취를 얻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인간이 처한 자연환경은 어떤 성취 없이 생존을 허락할 만큼 녹록하지 않았다. 인간은 개인을 뛰어넘은 영역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개개인이 기억창고에 모든 정보를 담을 수는 없을지언정, 활용할 수 있는 정보가 어디에, 누구에게 있는지 찾는 것은 가능했다. 돌멩이를 찾는 데 능한 인간이 돌을 깎는 데 재능이 있는 사람과 분업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무식한 문과생이 복잡한 변기장치를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속한 지식공동체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수원 해우재 똥박물관의 야외 조형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닮은 조형물이 제아무리 고독하게 배변활동을 한다고 해도, 그가 앉은 변기가 있기까지는 수많은 물리학자와 발명가의 공로가 필요했다. 출처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banyahappy/221233154923

 

   지식공동체의 효과는 양가적이다. 판단을 공동체에 맡기는 덕분에 인간은 효율적으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어떤 사안을 두고 심사숙고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이가 특정 영역에서 합리성을 발휘한다고 해서 다른 영역에서까지 그럴 거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인류는 생각보다 자주 비합리적으로 자신이 직접 했어야 하는 판단을 누군가에게 위임하는 존재다. 책의 제목인 지식의 착각, 그러면서도 마치 어떤 선택을 합리적 판단의 결과로 도출해낸 양 생각하는 인간행태를 저격한다.

   이는 언론에게 불편한 결론이다. 저널리즘은 소위 사상의 시장이란 자유주의 철학의 전통과 맞닿아 있다. 공론장에서 의견들이 상호 각축하며 진실을 향해가듯이, 자신이 정확한 정보를 취재하고 전달하기만 한다면 독자 대중이 사실의 진위와 가치를 판단해 올바른 판단으로 나아갈 거라 언론은 기대한다. 하지만 그 기대는 인간이 논쟁 중인 사안을 합리적으로 검토할 거란 전제 위에서만 성립한다. 개인이 합리성을 발휘하는 분야가 지극히 제한적이라는 명제는 그 전제를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팩트체크의 부상은 그래서 역설적이다. 본디 팩트체크는 문자 그대로 정보를 습득하는 언론이 기사 작성에 앞서 사실(fact)의 사실성을 검증해야(check)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오늘날 그 단어의 함의는 달라졌다. 이제 독자들은 언론이 사실만 전달하는 기관이라고 신뢰하지 않는다. 소위 한경오는 민주당이나 범진보 세력에, 조중동은 한국당과 범보수 진영에 이득이 되는 기사만 대서특필하고 상처가 되는 정보는 숨길 거라 그들은 짐작한다. 광고 때문에 정부나 기업의 부정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보기도 한다. 팩트체크는 그런 음모론과 저널리즘 회의론에 언론이 대응하는 전략이다. ‘우리가 검증했으니 믿으셔도 됩니다라는, 일종의 선언으로 그것은 기능한다.

 

2019년 3월 29일 현재 서울대학교팩트체크(SNU FactCheck)와 제휴를 맺은 언론사의 목록. 독자적으로 팩트체크 코너를 만들거나 팩트체크 행위를 선언한 언론은 이보다 더 많다. SNU FactCheck 인터넷 사이트 직접 캡쳐.

 

   디젤매니아 카페에 가입한 이후 나의 쇼핑 방법은 달라졌다. 욕심나는 옷이 생기면 일단 카페에 들어가서 쇼핑후기를 검색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어떤 경로로 쇼핑을 했는지, 어떤 방법으로 할인을 받았는지 검토해 본다. 물론 모든 후기를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은 아니다. 같은 옷이라 해도 더 싸게 구입한 사람은 없는지 개별 게시물들을 꼼꼼하게 비교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모든 정보를 카페에서 찾아본다는 점이다. 이제 나의 합리성은 디젤매니아 위에서만 작동하게 되었다.

   언론사마다 팩트체크 코너를 내세우는 오늘, 어떤 언론이 디젤매니아가 될 수 있을까. 아니, 자신이 세우려던 것이 애초에 디젤매니아였다는 사실을 아는 언론은 얼마나 될까. <지식의 착각>이 드러내는 현실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불편하다고 해서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쩌면 언론의 미래는, 그것이 뉴욕타임스에 있지 않음을 인정하는 데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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