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희의 뒷북

유민아빠 김영오씨의 잃어버린 명예 - 하인리히 뵐, 정영목의 책에 부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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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아빠 김영오씨의 잃어버린 명예 - 하인리히 뵐, 정영목의 책에 부쳐

moony1217 2019. 4. 15. 01:58

 

 

  두 종류의 책에 대해 말하고 싶다. 하나는 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소설을 다룬 책이다. 둘은 언론의 폭력을 말한다는 점에서 공통되다. 하지만 전자가 언론만을 다루는 반면, 후자는 언론을 둘러싼 맥락으로서 독자의 세계를 환기한다는 점에서 둘은 다르다.

 

  먼저 소설. 독일의 소설가 하인리히 뵐의 1974년작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블룸이라는 여성이 자신의 살인 행각을 경찰서에 자수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왜 그녀가 범죄를 저질렀는지 알아보고자 사건 발생 5일 전으로 되돌아간다. 그날, 블룸은 한 남자와 사랑을 나눴다. 그 남자는 공산주의자이자 테러리스트였고, 횡령범으로서 경찰에 쫓기는 중이었다. 하지만 만남의 순간에 그녀는 남자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녀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사랑을 시작한 이후의 일이었다. 테러행위를 돕거나 방조했다면 모를까, 사랑을 비난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그럼에도 언론은 외따로 떨어진 두 문장을 구부려 기어이 이어놓았다. 그리고는 "테러리스트"를 도왔다며 세차게 블룸을 비난했다. 비난의 말 속에서 그녀는 "음탕한 공산주의자"로 묘사됐다. 그녀가 가정부로 일하던 집의 주인 부부, 일가친척, 어머니까지 취재의 목록에 올렸다. 블룸의 사생활을 뒤지고, 그녀의 이혼 경력을 끄집어냈다. 그리고는 블룸의 불성실난삽한 성 관념을 말했다. ‘차가울 정도로 깔끔하다, 성실하다는 주인 부부의 증언은 다음날 신문에 계산적이고 치밀하다는 성격묘사로 나타났다. 남자를 쫓던 경찰이 카타리나를 서에 소환했을 때 이미 그녀의 말을 오롯이 들어줄 사람은 그곳에 없었다.

 

독일의 소설가 하인리히 뵐의 1974년작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해당 소설의 부제는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이다. 직접 촬영.

 

  블룸에게 선택지가 있었을까. 자신에 관한 모든 말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거짓이라고 말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울고불고 항변하다 지쳐 쓰러질 지경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들, 몸을 누일 사적인 삶조차 스러진 지 오래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 그녀로선 묻고 싶었을 법하다. 혹 자신의 목소리를 언론에 제대로 들려준다면 왜곡을 바로잡는 보도가 나올 것이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을 망친 신문기자 퇴트게스와 만나지만 퇴트게스는 그녀의 말에 관심이 없었다. ‘나랑도 뭔가를 하려는 거냐며 음흉한 표정으로 웃을 뿐. 소설 말미,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지는 배경이다 

  소설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언론이 사람의 일을 다루는 방식은 너무나 자주 부당하다.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보도의 소재가 살인을 저지른 사람일 때조차 그렇다. 블룸은 기자에게 총을 발사했다. 격발과 살인은 눈에 보이는 폭력이다. 하지만 그녀가 폭력을 행사하게 만든 요인은 어디에 있었나. 언론은 그녀의 삶을 유린하고 왜곡하며, 진실을 소명할 기회조차 앗아가지 않았나. 저자 하인리히 뵐은 10년 후에 쓰인 작가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헤드라인의 폭력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그저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 사람이 보이는 폭력을 행사한다면, 언론은 보이지 않는 폭력을 일상적으로 구사한다. 

  기자 퇴트게스와 그가 속한 매체 <차이퉁>만 그럴까. 악의적인 보도가 아니어도 언론은 종종 폭력을 행사한다. 사건의 맥락이나 서사보다는 범주화에 주목하는 탓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 '교제하던 미성년자, 부모 반대로 동반자살'. '불륜 유부녀, 기찻길에서 자살'. 신문의 헤드라인을 꼭 빼닮은 이 문장들은 한때 인터넷에서 유행한 패러디다. 각기 <로미오와 줄리엣>, <안나 카레리나>를 요약한 이들 문장을 두고 네티즌은 물었다. 안나 카레리나가 왜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졌는지, 아니 그 전에 왜 유부녀인 그가 외간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 기나긴 서사와 맥락을 신문기사는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가. 언론은 대개 유부녀, 20대로 누가, 살인이건 자살이건 무엇을을 구체화하며, 종종 어떻게를 묘사한다. 간간이 를 규명할 때도 있지만 피상적인 차원에 그친다 

언론의 보도행태를 풍자한 그림. 특정 부분만을 편집하고 강조함으로써 언론은 가해자를 피해자로,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 수도 있다. 명백한 현실 왜곡이다. 출처 : https://jerzygirl45.wordpress.com/tag/its-media/

 

  소설에 미달하는 언론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언론집단의 구성원은 부단히 노력해왔다. 하인리히 뵐의 소설이 나온 1974년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비판을 마주해온 언론이다. 당사자의 이야기를 충실히 듣고, 사건의 맥락을 섬세하게 살피려는 시도를 언론은 했다. 트루먼 카포티로 대변되는 미국의 뉴저널리즘이 대표적인 예다. 뉴저널리즘은 그 기법상 통상적인 기사보다는 소설에 훨씬 가깝다. 문학적 묘사로 독자의 주의를 환기하는 것은 물론, 등장인물을 비롯한 사건의 구성요소 곳곳에 상세한 주의를 기울였다. 심층 인터뷰는 또 다른 예다. 작게는 한 면, 크게는 두 면까지 공간을 낸 결과 신문은 한 인간의 기억과 생각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철학적인 다양성이 확보되기도 했다. 기존의 저널리즘은 객관주의라는 철학 위에 서 있었는데, 이는 사실이란 그 자체로 오롯하게 존재한다는 전제를 지녔다. 오늘날 언론은 진실과 사실을 구분하고, 사실의 이면을 질문하려 한다. 늘 그리하지는 못할지언정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만큼은 자각하고 있다.

  지난 12, 경향신문 토요판 기사를 보았다. 기사를 작성한 선배는 세월호 5주기에 앞서 세월호 희생자 김유민의 아버지, 김영오씨를 만났다. 언론에 의해 통상 유민아빠라고 불리는 그는 지난 5년간 온갖 종류의 오해와 음해에 시달렸다. 이혼 후 한 번도 양육비를 보내지 않은 사람이다,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받으려고 단식했다. 선배가 만난 그는, 자신을 둘러싼 소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분량은 짧게는 400, 길게는 2000자에 이르는 일반적인 스트레이트 기사와 궤를 달리할 정도로 길었다. 그만큼 촘촘하게, 세간의 오해와 맞서는 정황들이 기사에 실렸다. 곡해가 만든 상처, 상처를 보며 길어낸 상념이 거기엔 있었다.

  소용없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는 양육비를 보낸 내역을 증명하고자 통장을 까고, 언론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단식 취지가 세월호특별법통과에 있음을 말했다. 유민 엄마와의 이혼 사유가 경제적 문제에서 비롯한 것임을 말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전라도 태생이라는 둥, 강성 노조에 속해있다는 둥 그의 정체성을 공격하는 말들 가운데 사실관계에 부합하는 것들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지 않나. 소속은 누군가의 성향을 짐작하는 데까지는 유용할지언정, 누군가의 행위를 증명하는 결정적 근거는 될 수 없다. 선배의 기사는 그 근거없음의 사태를 듣고 말하는, 상식적인 수준의 윤리 위에 서 있었다. 기사에 달린 댓글은 그 상식과 처절할 정도로 멀었다.

 

지난 13일 발행된 장은교 선배의 기사에 달린 베스트 댓글들. 기사 안에 이미 설명된, 혹은 기사와 무관한 논점이 드러나 있다. 직접 캡쳐. 출처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934327

 

  이제 다른 책을 말해볼 차례다. 번역가 정영목은 저서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법>에서 필립 로스의 소설 <미국의 목가>를 분석한다. <미국의 목가>의 주인공은 시모어 스위드 레보브인데, 그의 이야기는 네이선 주커먼이라는 화자의 입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소설의 초반에만 해도 화자 주커먼은 주인공 스위드를 성공한 유대계 미국인이란 프레임 속에서 바라본다. 소위 아메리칸 드림을 내면화한 속물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 스위드와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면서 주커먼의 생각은 달라진다. 소설 말미에는 선의를 갖고 성실하게 살았으나 시대와의 불화로 끝내 실패한 인물로 그려지기까지 한다.

  해당 소설을 두고 정영목은 이렇게 말한다. “주커먼이 스위드의 삶의 진실로 들어가는 과정은 곧 이 소설이 쓰여나가는 과정임과 동시에 그것을 읽는 독자가 한 개인이 아프게 겪어내는 삶을 가장 깊은 의미에서 함께 겪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필립 로스는 주커먼을 앞세워 스위드를 보았다. 스위드에 대한 주커먼의 인식이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의 생각도 바꾸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독자가 소설을 끝까지 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주커먼의 변화를 보지 못한 독자가 스위드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독자의 생각이 변화할 거라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

 

번역가 정영목의 저서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정영목은 미국인 소설가 필립 로스, 존 업다이크,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물론,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이창래, 아일랜드 출신의 문학인 오스카 와일드의 책까지 번역한 경험이 있다.

 

  묻고 싶다. 언론이 개인의 삶을 충실히 서사화해도 왜 개인은 여전히 불행한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개인이 저지른 총격의 이면에 언론의 비가시적인 폭력이 자리해 있었다는 사실을 그려냈다. 그에 따르면 폭력의 근저는 언론의 의도적인 왜곡, 혹은 무심한 보도관행이었다. 정말 언론만 잘하면 끝나는 일인가. 기사를 읽지 않고 댓글을 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기사에서 충분히 해소된 의문을 굳이 거론하는 사람도 자주 본다. 읽지 않은 기사를 인용하고, 자극적인 헤드라인만 가져다가 SNS에 공유하는 사람은 또 어떠한가. 김영오 씨는 왜 명예를 잃게 되었나.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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