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희의 뒷북

누구를 위하여 목을 내미나 - <보이지 않는 고통>, 캐런 메싱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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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하여 목을 내미나 - <보이지 않는 고통>, 캐런 메싱

moony1217 2019. 4. 4. 03:33

 

  “너희들 그러다 거북목 된다.” 입사 후 선배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갑자기 뭔 얘긴가싶어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가 고개를 쭉 내밀고 있다. 어깨는 한껏 웅크린 상태, 노트북 화면에서 누가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것 같다. 물론 목 길이나 목을 내민 정도는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자라, 남생이, 거북이 모두 똑같은 거북이 아닌가. 새삼 신경이 쓰여 목을 뒤로 당겨도 보고, 어깨를 젖히는 스트레칭도 해 보지만 별무소용이다. 30분 후면 모두가 다시 거북이 모드로 돌아간다. 이렇게 호모 사피엔스는 파충강 거북목 동물로 진화하는 것일까.

 

종종 오해받지만,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진보’를 말하지 않았다. 그가 말한 진화는 진보보다는 ‘적응’에 가까운 의미였다. 변화하는 자연에 적응하는 동물이 주로 살아남는다. 인간이 거북이로 변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물론 농담이다.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아름다운 평화의 나라’ https://blog.naver.com/togksmf5326/150128916793

 

  '후대에서 볼 때나 진화지, 당대에는 변종 아닌가' 두려운 마음으로 선배에게 묻는다. “선배들은 어떻게 건강을 관리하시나요.” 돌아오는 대답은 크게 두 종류다. “나 사실 거북이야라는 고백, 아니면 노오력해야 한다는 충고. 고백은 답이 될 수 없으니 후자를 따라야 하는데,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아 재차 묻는다. 노력이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운동을 다닌다. 중간중간 스트레칭도 잊지 않는다. 뭣보다 중요한 건 장비다. 노트북을 올려놓는 받침대나 쿠션이 가득한 마우스패드 같은 거. 하지만 궁금하다. 내근이라면 칼, 방패, 갑옷까지 모두 장착할 수 있다. 그런데 밖에서 계속 돌아다녀야 한다면? 중간에 자세도 잡지 못한 채 바닥에 앉아 보고를 올려야 한다면? 운동할 시간은 또 어디서 나오나? 나는 한 마리 어른 수습, 밀려오는 질문을 곱씹다 조용히 검색창에 산업재해보험이란 글자를 두드려 볼 뿐이다.

  문제는 산재 신청조차 법원에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점이다. 캐나다의 과학자 캐런 메싱은 저서 <보이지 않는 고통>에서 이렇게 말한다. “산재보상 여부를 결정하는 판사들이 조립라인의 노동조건을 상상하지 못하면, 그들은 작업관련성 질환에 대한 보상 요청을 기각한다.”(40p) 업무상 재해가 인정되는 과정을 생각해 보자. 한 노동자가 자신의 몸에 이상징후를 발견한다. 이유를 고민하던 그는 자신이 종사하던 업무가 질병의 원인이 아닐까 의심한다. 하지만 고용주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보상을 받고자 노동자는 법원을 찾는다. 결국 최종 결정은 법원의 몫이다. 판사가 노동자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캐나다 과학자 캐런 메싱의 저서 <보이지 않는 고통>. 직업 보건 연구자로서 저자는 노동 현장의 환경이 노동자의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평생을 탐구했다. 계산대 점원은, 은행원, 청소 노동자, 간호사, 웨이트리스 등 사회 각지의 노동자가 그의 연구 대상이었다. 직접 촬영.

 

  안타깝지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다. 사회에는 노동에 대한 몰이해가 만연하다. 저자의 용어를 빌리면 공감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공감 격차란 "과학자나 정책 결정권자가 노동자의 입장에서 역지사지하려는 의지나 능력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18p) 계급, 지역, 연령 등 처지에 따라 사람은 각기 다른 경험을 하기 마련이다. 서울 본사의 정규직 부장 가운데 지방 하청업체 노동자의 업무 환경을 경험한 이가 몇이나 될까. 저자에 따르면 이렇게 다른 경험은 상대를 이해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 고용주는 물론, 법원의 판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공감격차의 상황이다.

  물론 안전장치는 있다. 어떤 노동자가 자신의 질병을 두고 업무상 재해라는 주장을 펼치면 법원은 과학적 근거를 요구한다. 그리고 외부 전문기관에 역학조사를 의뢰한다. 과학만큼은 객관적인 근거를 제공해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믿음에 딴지를 건다. 과학도 '공감 격차'의 문제로부터 그리 자유롭지 않다고 그는 말한다. 책에 나온 예를 보자. 반년 동안 주당 50시간씩 전선을 잡아당기고 벗겨낸 노동자들이 노동의 결과 손목 질환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많은 의사는 업무와 재해의 연관성에 회의감을 표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두 시간쯤 테니스를 친 이들이 같은 증상을 호소했을 때 충분히 그럴 수 있다며 공감했다. 글쎄, 그렇게 힘든 테니스라면 돈이라도 받고 쳐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엘리자베스 비제-르브렁의 그림 ‘슈미즈 차림의 앙투아네트(1783)’. 프랑스왕 루이 16세의 왕비로 알려진 마리 앙투아네트는 굶주리는 당대의 백성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빵이 없다고? 그럼 케이크를 먹으라고 하세요.” 하지만 후대 역사학자들은 그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프랑스 혁명 때 남편과 함께 목이 잘렸으니, 군중들은 마리가 저 말을 했다고 믿었던 걸까, 아니면 죽이고 난 후 그녀에게 오명을 덧씌운 걸까. 확실한 건, 저 말이 사람을 꽤나 빡치게 한다는 사실이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인물세계사’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67268&cid=59014&categoryId=59014

 

  과학자들이 특별히 공감능력이 부족하거나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과학자들 역시 자신의 계층적 기반에 기대어 사고해서 그럴 뿐이다. 대다수 연구자는 중산층이다. 장학금을 받으며 고학한 이도 물론 있지만 그 숫자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할 만큼 많지 않다. 아무래도 피복 벗기는 일보다는 테니스가 중산층에게 익숙하지 않았겠는가. 여기에 연구 비용 조달까지 고려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논문을 게재할 학술지를 발행하고, 특정 주제의 연구를 주문하는 이들 중에는 기업처럼 특정 이해를 대변하는 집단의 관계자가 많다. 노동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보건 환경 개선을 연구주제로 삼는 과학자 자체도 많지 않지만, 설령 그런 이가 있다 해도 연구를 수행하기 쉽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 과학 연구 자체의 특성을 더한다. "전문적으로는 어떤 위험이 건강과 관련이 있는지를 추정할 때 해당 위험요인이 건강문제와 관련이 없다는 것을 기본 가설로 하여 그 가설이 맞을 가능성이 5퍼센트 미만이어야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240p) 바꿔 말해, 특정 업무 환경이 노동자의 건강에 이상을 불러올 가능성이 95퍼센트 확률로 나타나야 질병과 업무 사이의 인과성이 입증된 것으로 본다는 얘기다. 너무 높은 숫자 아니냐고? 하지만 "과학자들은 단도직입적이고 완전무결한 진술을 하지 않도록 훈련받는다."(248p) 그리고 이렇게 나온 '입증되지 않았다'는 논문의 진술을 고용주나 법원은 '연관성이 없다'는 뜻으로 종종 해석한다. 과학이 판결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역설적인 것은, 그럼에도 저자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학에 보내는 세간의 신뢰를 역이용할 수 있다고 저자는 본다. "과학은 고용주들과 대중이 공감 격차를 넘어서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과학자들이 가진 신뢰도는 노동조건 개선과 건강장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된다."(267~268p) 노동자의 상황을 이해하는 과학자가 늘어난다면, 판사가 기댈 근거 가운데 노동자에게 유리한 것도 그만큼 늘어난다. 저자가 보건 연구 영역에 칼날을 날카롭게 겨누는 이유다.

 

<보이지 않는 고통>의 저자 캐런 메싱(우측). 메싱은 지난해 11월 한국을 방문해 고려대 보건과학대학 교수 김승섭과 대담을 나눴다. 노동자의 삶의 조건과 작업환경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스스로를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사회역학자’라 부른다. 출처 : 경향신문 기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11071520001&code=940702#csidxea219b8b6cb2ff98925de57f2029cf3

 

  어디 판사나 과학자 뿐이겠는가. 저자가 고려하는 영향의 연쇄에서는 빠져 있지만, 판결에 영향을 주는 요소는 과학만이 아니다. 판사는 여론에 영향을 받고, 여론은 언론의 의제설정으로부터 생각을 전개하는 경우가 많다. 아니, 그나마 산재 인정은 단순한 편이다. 인정 자체는 매우 까다로운 절차를 요구하지만, 그만큼 일단 인정되면 상당한 효력이 생긴다. 판결이 나오면 정부나 고용주는 즉각적으로 보상절차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조건의 변화는 이보다 복잡하다. 1989, 캐나다 퀘백주에서 슈퍼마켓 계산대 점원이었던 지라르는 법정 판결을 통해 '앉을 권리'를 보장받았다. 하지만 대다수 노동자들이 의자의 부재를 공론화하지 않았다. 법적으로 보장된 앉을 권리보다 중요한 것이 그들의 삶엔 많았기 때문이다. "계산원, 영업직 직원, 접수원, 주유소 직원 등의 주된 관심사는 생계를 꾸리기에 충분한 시간 동안 일하는 것이다. ... 그들은 자신의 근무시간을 결정하는 관리자에게 의자를 요구함으로써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104p)

  그동안 언론은 누구의 관점에서 보도했던가. 출입처라는 안일한 관행에 젖어 섣불리 기업의, 재력가의, 또는 정부의 관점에서 기사를 작성해 오지는 않았나. 노동자의 입장에서만 사안을 재단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노동자의 상황에 대해서도 다른 이에게 하는 만큼 충분히 고려했던가 궁금한 것이다. 언론이 조금 더 공정했더라면, 공감격차를 극복하는 과학자들이 세상에 조금 더 많아지지 않았을까. 그 이전에, 홀로 존재론적 한계를 극복한 소수 연구자를 충분히 만나보기는 했었나. 나 자신, 그리고 동료들의 거북목을 고치는 길도 어쩌면 거기서부터 시작될는지 모른다.

  생각이 많아지는 밤, 궁금하다. 우리는 과연, 누구를 위하여 목을 내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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