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희의 뒷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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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에 담지 못한 이야기 - 뒷면

출발선 앞의 이수인과 이름 모를 당신들에게

moony1217 2019. 5. 6. 23:23

 

  기사를 쓰는 동안 어떤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드라마 <송곳>의 한 장면. 주인공 이수인(지현우 분)은 경찰서 앞에서 달리기를 한다. 아직은 아니지만 이제 곧 뛰기 시작할 것 같다. 조금 전 그는 부진 노동상담소에서 일하는 문소진(김가은 분)의 전화를 받고 경찰서에 왔다. 오긴 왔지만 자신을 왜 불렀는지조차 그는 알지 못한다. 멀뚱히 서 있는 그에게 문소진은 말한다. "경찰이 달리기 시합에서 이기는 쪽만 받아준다고 한다." 자신이 잘 달리지 못하면 억울한 일을 겪고 있는 노동자들이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궁금했다. 이수인은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2015년 JTBC에서 방영한 드라마 <송곳>의 한 장면. 출처 : 네이버뉴스 https://entertain.naver.com/read?oid=437&aid=0000096489

  수습기자 신분으로 사회부 사건팀에 배속된 첫 날, 종로경찰서 정문 앞에서 나는 한참을 서성였다. 서른 두 해를 살았지만 제 발로 오는 상상 따위 해보지 못한 장소였다. PD로서 촬영도 와 보고, 타 매체에서 잠깐이나마 기자로도 살아봤지만 여전히 그랬다. 살인, 폭행, 사기 같은 범죄나 억울함, 분노, 슬픔 같은 감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아니, 그 비슷한 단어들이 떠올랐다. 한겨레의 안수찬 기자가 처음 경찰서를 찾은 날엔 세상만사가 왈칵 쏟아져 들어왔다는데 나는 어째 왈칵 겁부터 났다. 안온한 일상을 살아온 내게 경찰서는 너무 낯설고 두려운 곳이었다.

  하지만 도망칠 곳이 없었다. 도리 없이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닫힌 형사과의 유리문 너머 경찰 행색을 한 아저씨가 보였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문을 좀 열어 달라고 말했지만 그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열어줄 수 없다고 답했다. ‘그래, 이런 곳이었지조금씩 기억이 났다. ‘일단 적응부터 하자’, 그런 생각을 하며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리고 민원인 실로 들어갔다.

  그곳에 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갓 태어난 햇빛이 비쳐드는 창문 앞에서 고개를 쳐박고 수첩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언뜻 사람의 이름 같았다. 새벽 6, 나야 그렇다 쳐도 그는 무엇을 하러 경찰서까지 오게 된 걸까. 사기를 당했나?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건넸다. 그는 막 과거로 내려온 터미네이터를 보는듯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집회 신고하러 왔습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는 간밤에 경찰서 안에서 잠을 잤다고 말했다. “민원인실이 이렇게 좁은데 여기서 어떻게 주무셨어요라며 되묻자 그는 이곳에서 잔 게 아니라고 했다. 그럼 어디서, 문장을 닫기도 전에 그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했다. 경찰서 안이 아니라 바깥이었다. 종로경찰서를 마주 보고 왼편으로 열 걸음 정도 걸어가니 사람이 네댓명 간신히 들어갈 법한 작은 가건물이 나왔다. 20대로 보이는 여성 한 명과 40대로 추정되는 여성 한 명, 그리고 50대인 듯한 남성 한 명이 그곳에 앉아있었다.

  이후 종로경찰서와 남대문경찰서를 오가며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 중 일부는 며칠씩 밤을 새워가며 경찰서에 머물렀다. 집회를 열거나 시위를 하겠다고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서였다. 현행법에 따르면 옥외집회나 시위를 주최하려는 사람은 신고서를 집회 시작 48~720시간 전에 관할 경찰서장에게 제출해야 한다. 토요일 집회를 열고자 한다면 수요일 자정 이후 신고가 가능하다는 뜻이다. 언뜻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러면 수요일이 지난 아무 때나 경찰서에 오면 되지 않을까.

지난달 30일 오후 11시 서울 남대문경찰서. 보수단체 관계자들이 집회 신고 대기장소에 앉아있던 퀴어퍼레이드 관계자들을 둘러싸고 있었다고 한다. 출처 : 한채윤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230507146

  아니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집회 장소는 정해져 있었다. 집회를 왜 여는가 생각해 보면 답은 분명했다. 이왕이면 자신의 목소리가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기를 이들은 바랐다. 자연히 서울시청 앞 대한문, 광화문 교보빌딩, 서울역 광장처럼 인파가 몰리는 몇몇 장소가 인기를 끌었다.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평일보다는 주말이 집회를 열기에 적합했다. 시간과 장소는 제한되어 있는데 원하는 사람은 많으니 경쟁이 생겼다. 신고 시점이 수요일 자정 이후라는 느슨한 시간대에서 수요일 자정이라는 단일 시각으로 좁아져 버린 배경이다.

  이렇게 같은 시간과 장소를 두고 여러 집단이 집회를 신고하는 현상을 중복신고라고 부르는데, 중복신고에 관한 한 경찰은 뾰족한 해법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저 선착순으로 신고를 받을 뿐이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사이좋게 집회하라며 조정할 권한이 있긴 했지만 강제규정이 아니었다. 먼저 신고한 단체가 싫어요. 혼자 열래요라고 말하면 딱히 그러면 안 돼라고 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혹시라도 1순위로 신고한 단체가 양보를 해주지 않을 가능성이 변수로 작용하는 한 집회 신고자의 계산은 뻔했다. 자신이 1순위가 되는 것만이 우월전략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고생하고 있었다. 진보와 보수, 젊은이와 노인이 다르지 않았다. 안 그래도 뭔가 쌓인 게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 감정이나 신념이 늘 옳은 것은 아니겠으나,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이렇게 힘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무작정 순서에 맞춰 기다리는 일에는 인력 동원이 가능한 단체일수록 더 유리하다. 조직원들끼리 번갈아 가며 대기하는 식의 전략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안으로 작성한 기사에 선배가 더한 문장이다. 그의 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겨냥한 집회가 벌어지지 않도록 재벌 대기업은 허위신고나 알박기 같은 전략을 구사하곤 했다. 지금의 선착순 신고방식이 바뀐다면 이런 문제도 조금은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당장 뾰족한 해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온라인 신고는 트래픽 등으로 인한 다운에 취약하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홈페이지 다운으로 집회 신고 우선순위에서 밀린 주최자로선 공정성 문제를 거론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신청 장소가 경찰서에서 집으로 바뀔 뿐 선착순으로 결정하는 방식 자체는 현행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집회 신청자 간 갈등이 지속되는 것은 물론, 외려 컴퓨터 사용에 익숙지 않은 노년층의 집회 신고를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경찰의 조정 역할을 강화하는 방안도 마땅치는 않다. 경찰이 집회 신고를 한 여러 집단 가운데 어느 한쪽에 편향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2003년 경향신문 기사를 보니 모 단체가 집회를 신고하자 경찰이 이를 특정 기업에 귀띔하고는 기업을 우선접수시켰다는 내용이 있었다. 전화 인터뷰한 모 교수는 지금처럼 권한과 책임이 애매한 상황보다는, 판단에 따른 책임을 경찰이 명확히 지도록 하는 게 낫다고 했지만 글쎄, 과연 어느 정도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웹툰 <송곳>의 한 장면. 최규석 작가는 작품에서 노동조합 활동에 참여하게 된 한 인물의 심리를 치밀하게 그려냈다. 출처 : 알라딘 서재 http://211.111.219.13/mephisto/popup/7193052

  그저 그런 상상을 했다.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 이수인의 머릿속에선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까. 자신을 보며 손을 들고 힘내라외치는 동료들과 저 너머 결승선 앞에 서 있는 경찰의 모습은 그에게 어떤 상념을 안겼을까. 어쩌면 그가 떠올렸을 많은 생각 가운데 일부는, 굳이 하지 않았어도 되는 고민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경찰서에서 몸을 구부린 채 쪽잠을 청하고 있을 누군가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전적으로 선배 덕분에 쓴 기사였다.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무엇 하나 내 능력만으로 채워나간 것이 없었다. 붙들고 있던 것은 오직 송곳의 한 장면 뿐. 출발선 앞의 이수인과 이름 모를 당신들을 생각하며, 나 역시 출발선 앞에 서 있다.

 

집회 자유는 선착순? ... 신고 위한 몸싸움 말고 대안은 없나

링크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5061652001&code=9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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