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희의 뒷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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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설과 단상을 심어놓는 공간 - 뒤란

밥 권하는 소리가 없다

moony1217 2019. 4. 16. 01:58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늘 롯데샌드가 함께 떠오른다. 입대 후 첫 휴가날, 부모님은 자식 고기 먹인다며 장 보러 가시고 집에는 나와 할머니 둘 뿐이었다. 간만에 네이트온을 켜고 친구들과의 대화에 정신이 팔린 나였다. 할머니가 사라질 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거동도 불편하신 분이 어디 가셨나, 집밖으로 나가 한참을 찾아 헤맸다. 어디에도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치매, 납치, 노인 증발 같은 부정적인 단어가 뇌리를 스쳤다.

  그렇게 얼마나 헤맸을까. 아파트 정문 쪽에서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안도감과 원망이 뒤섞여 다리에 힘이 풀렸다. 도대체 어디 갔었냐며 나는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런 나를 그녀는 굽은 등으로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입을 열었다. "너 이거 좋아하지?" 그의 손에는 롯데샌드가 들려있었다. 어릴 적 외갓집에서 내가 즐겨찾은 간식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당연하다는 듯 눈물이 많이 났다.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어린시절을 함께한 만큼 추억이 너무 많았다. 자라서 자주 찾아뵙지 못한 죄송함도 컸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무슨 대가라도 치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무력했다. 생전 내본 적 없는 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입도 눈물구멍도 닫지 못한 채, 그때 나는 온갖 감정을 바깥으로 내뱉기만 했던 것 같다.

  그런 내 입에 엄마와 이모는 수저를 들이밀었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밥이라니. 이렇게 슬픈데 어떻게 밥이 들어가겠냐고 나는 따져 물었다. 나보다 더 슬펐을 엄마였지만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엄마의 답은 의외였다. "그래야 할머니 가시는 길을 끝까지 지킬 것 아니냐."

  그땐 몰랐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산 자에겐 그를 보내야 하는 임무가 있다. 전적으로 삶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기에 그 임무엔 슬픔과 기쁨이, 이상과 먹고사는 문제가 혼재돼 있다. 과거 조상들은 가족의 죽음 앞에서 3년상을 치렀다. 문화가 달라진 오늘도 발인까지 최소 3일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공식적인 장례절차만 해도 그렇다. 마음으로 아픔을 극복하는 일에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밥을 먹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이들의 마지막을 지켜줄 방법이 과연 있을까.

  세월호 참사 직후, 가족을 잃은 부모형제의 모습을 보았다. TV 속 그들은 나보다도 눈물이 많았다. 저렇게 울고도 또 울 수 있을까 싶었는데, 물 속에서 찾은 자녀의 물건에 그들은 또다시 무너졌다. 울다 못해 곡기를 끊은 이도 보였다. 할머니가 전해주신 롯데샌드 생각이 났다. 노환으로 별세했으니 호상이다, 그런 얘기가 오가는 와중에도 그리 슬펐거늘 저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어떻게 밥이 넘어가겠는가.

  하지만 방송뉴스의 다음 장면은 의외였다. 단식을 두고 의심하는 이들이 화면에 나왔다. 폭식하며 조롱하는 이들의 모습도 함께 보였다. 유가족은 보상을 바라는가 그들은 물었다. 슬퍼하기만 하고, 단식 같은 행위로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는 말라는 뜻이었을까. 정작 단식이 그치자 다른 말이 나왔다. ‘결국 밥 먹네.’ 밥을 먹는 아버지는 슬프지 않을 거라 예단할 수 있는 것인가.

  '슬퍼하다'라는 한국말을 독일어로는 trauerarbeit라 적는다. 이 슬픔과 노동의 합성어는 우리에게 사소한 진실 하나를 일러준다. 슬퍼하는 것도 이다. 밥을 먹어야 일을 할 것 아닌가. 외할머니의 발인을 앞두고 나는 엄마가 건넨 수저를 들고 억지로 밥을 입 안에 우겨넣었다. 그 힘을 빌어 장지까지 가까스로 갈 수 있었다. 밥을 먹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장례를 치르며 배웠다. 슬픔에 젖은 개인은 밥을 먹을 수도, 곡기를 끊을 수도 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밥을 입에 넣지 못하는 것은 그의 몫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굶는 이에게 밥을 권해야 한다. 그것이 옆 사람의 역할이다. 힘을 잃은 이에게 수저를 내밀었기에 가족은, 친지는, 나아가 공동체는 슬픔의 과정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었다.  

  세월호 유가족을 두고, 오늘 또 다시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궁금하다. 유가족 앞에서, '정말 슬프다면 밥을 드시라'고 권하는 목소리, 그때는 있었나. 지금은 얼마나 있나. 슬픔의 진정성을 묻기 이전에, 식사를 권하는 말은 얼마나 진정했나. 그때도 지금도, 우리는 슬퍼하는 법도, 슬퍼하는 사람을 위무하는 법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옆 사람이 자리한, 그런 풍경이 아닌 세상을 사회라고 불러도 좋은 것일까.

 

 

지난 2014년 8월 20일 경향신문에 실린 '유민아빠' 김영오씨의 모습. 당시 그는 서울 광화문 세월호 유가족 농성장에서 38일째 단식을 이어가고 있었다. 출처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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