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희의 뒷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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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꾸는 모습으로 나를 사랑해줘

moony1217 2021. 5. 19. 02:50

   영화의 제목 <버드맨>은 짓궂은 농담이다. 2014년 개봉한 영화는 첫 장면에 추락하는 물체를 담는다. 10초 가량 추락이 이어지지만 불에 타면서 떨어지는 통에 물체의 정체는 알기 어렵다. 그러다 덜컥 화면이 바뀌고 공중부양하는 남성의 뒷모습이 보인다. "여긴 우리가 있을 곳이 아냐", 흰 팬티만 덜렁 걸친 그의 등으로 카메라가 줌인하는 동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남성은 땅으로 내려와 거울을 본다. 남자의 얼굴과 '버드맨' 글자가 적힌 포스터가 거울에 함께 비친다.

   남자의 이름은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 한물 간 영화 배우다. 그가 주연한 슈퍼히어로 영화 '버드맨'은 시리즈로 제작되며 수천만 달러 흥행 수익을 거뒀다. 3편이 참패하지만 않았어도 그의 커리어는 내내 화려했을지 모른다. 물론 지금도 사람들은 그를 버드맨으로 기억한다. 길거리에서, 술집에서 사진을 함께 찍자는 사람들이 쇄도한다. 하지만 요즘 리건의 소망은 영화배우가 아니다. 자신이 각색, 연출하고 주연을 맡은 연극이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하기를 그는 꿈꾼다.

   그의 소망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다. 과거의 성공이 지금 리건에겐 장벽이다. 브로드웨이에서 인정받는 배우 마이크 샤이너(에드워드 노튼)는 리건의 연극에 출연하면서도 그를 무시한다. "문화를 말살하는 슈퍼히어로 영화나 찍으시지." 뉴욕타임스의 연극 비평가 타비사 디킨슨(린제이 던칸)은 그의 연극을 보지도 않은 채 말한다. "내일 당신 연극을 박살낼 거야. 다른 좋은 연극이 올라갈 기회를 빼앗았으니까." 영화로 사랑받은 과거와 연극으로 구애하는 현재의 긴장이 서사의 큰 줄기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하필 연극배우를 꿈꾼다는 게 리건의 비극이다. 그가 누군가의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감독 알레한드로 이냐리투는 영화 오프닝부터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삐에로>을 오마주한 오프닝은 미국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의 시 '최후의 편린(Late fragment)' 속 구절을 비춘다.

"And did you get what you wanted from this life, even so?(당신은 이 삶에서 원하는 것을 얻었나요?)" "I did.(네)" "And what did you want?(그게 뭐였나요?)" "To call myself beloved, to feel myself beloved on the earth.(내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느끼는 것)

  하지만 이는 해답이 아닌 질문에 가깝다. 사랑을 왜, 어떻게 받는지가 리건에게는 더 중요하다. 리건이 무대에 올리는 연극의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카버의 단편소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What we talk when we talk about love)>(1981)을 각색한다.

  원작은 네 명의 남녀가 술을 마시며 각자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등장인물 테레사는 자신을 죽이고 자살하려 한 전남편 에드를 말한다. 그의 자학은 자신을 너무 사랑한 결과라고 테레사는 해석한다. 옆에서 진을 마시던 현 남편 멜 맥기니스는 그건 사랑이 아니라며 그녀를 비웃는다. 그러면서 교통사고로 나란히 자신의 병원에 실려온 노부부의 이야기를 꺼낸다. 아내가 살았다는 사실을 알고도 남편은 괴로워했는데, 온몸에 깁스를 한 탓에 아내를 돌아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고 멜은 말한다. "사랑은 그렇게 절대적인 것이지."

  멜의 대사와 달리 소설은 누구의 사랑관이 옳다고 답을 내리지 않는다. 등장인물 각자의 상처, 기억과 더불어 사랑의 다양한 형태를 드러낼 뿐이다. 한때 사랑이라 믿었던 것이 지금 보니 사랑이 아니었다는 대사도 나온다. 리건이 과거 누렸던 영화배우로서의 인기는 사랑이었을까. 리건의 전처 실비아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늘 사랑과 존경(admiration)을 혼동하잖아."

  과거 리건은 불행했던 것 같다. 전처는 리건이 늘 술에 취했고, 이따금 외도했다고 전한다. 본 연극의 막을 올리는 날 리건은 이런 이야기도 꺼낸다. 과거 외도 사실을 들켰을 때, 말리부 해변 물에 들어가 죽으려 했다고, 하지만 해파리에 쏘여서 실패했다고. 엉망이었던 만큼 딸 샘과의 관계도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 리건은 실비아에게 말한다. "그때가 후회돼. 나는 그 안에 없었어."

 

나를 쫓는 모험

  연극은 영화로 상징되는 과거의 안티테제로 소환된다. 첫 프리뷰 공연을 마치고 찾은 술집에서 마이크는 그에게 "왜 하필 카버의 소설을 골랐냐"고 묻는다. 리건은 상자를 뒤적여 몇글자 문구가 적힌 냅킨 한 장을 꺼낸다. "고등학교 때였어. 교내 연극을 하는데 그가 객석에 있었지. 끝나고 내게 이걸 줬어. '진실된 연기 고맙다.' 그걸 보고 배우가 되기로 했어." 연기이지만 진실된 것, 연극은 그가 온전한 자신을 드러내는 공간의 은유다.

  당장 연극이 그를 구원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의 연극활동은 자금 부족과 주변의 무시로 후달리기 일쑤고 주변의 시선도 곱지 않다. 그를 인터뷰하러 온 기자는 묻는다. “퇴물 슈퍼히어로 이미지 벗으려고 이 연극을 한다는 시각이 두려우신가요?” 샘은 대마초를 피우다 걸린 뒤 아버지에게 소리친다. "이 연극 하는 건 진짜 밑바닥 인생이 될까봐서죠. 예술이 아니라, 아빠의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서잖아요." 리건도 안다. 관객의 찬사를 받는 것이 목표라면 영화가 더 빠른 길일지도 모른다. 리건 자신도 헷갈린다. 그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영화 <어벤저스>로 대박쳤다는 뉴스에 인상을 찌푸리며 TV를 끈다.

  이따금 나타나는 버드맨의 환영은 그의 분열증적 고뇌를 드러내는 장치다. 평론가에게 무시당한 뒤 떡이 되도록 술을 마신 그는 아침에 깨자마자 버드맨의 목소리를 듣는다. "넌 무비스타야. 세상 모두가 알아주잖아. 굵직한 영화로 화려하게 컴백하면 돼." "전세계 10억달러는 거뜬해. 넌 위대한 배우야." 그 열망이 얼마나 강력한지, 물건을 염력으로 부수고 리건의 몸이 하늘로 뜰 지경이다. 물론 이는 그의 환상이다. 연극 프로듀서인 제이크는 리건이 손으로 물건을 집어던지는 모습을 본다. 극장으로 날아온 리건의 뒷편에선 택시기사가 외친다. "손님! 요금 안냈잖아요!" 영화는 그가 모순된 욕망과 싸워가는 여정이다.

  이냐리투 감독이 택한 롱테이크 기법은 리건의 싸움을 표현하는 데 효과적이다. 첫 시퀀스에서 거울을 보던 리건은 마치 미로처럼 보이는 복도에 들어선다. 리건의 일인칭 시점을 따라 카메라는 좁고 긴 길을 걷고 때로는 샘과, 때로는 마이크와 말다툼이 벌어진다. 투닥거리는 듯한 드럼비트도 끊이지 않는다. 이냐리투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관객이 미로처럼 복잡하고 폐쇄공포증처럼 숨막히고도 필연적인 주인공의 평범성을 리건의 입장에서 경험하기를' 바라며 롱테이크 기법을 택했다고 말했다.

 

연극, 그 미묘한 설정

  영화가 보여주는 연극은 원작 소설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소설에서 '에드는 나를 죽이고 자살하려 했다'는 정도로 축약되는 장면이 연극에서는 한 막을 차지하는 분량으로 나타난다. 리건은 1인2역을 맡는다. 1막에서는 멜-테레사 부부와 술을 마시는 주인공 역할이지만 2막에서는 에드의 모습이다. 대사는 영화배우로서 리건이 겪었던 혼란을 요약한 것처럼 들린다. "난 당신이 원하는 남자가 되고 싶었어. 내가 아닌 다른 남자가 되길 매순간 기도했다고." "나는 존재하지 않아. 난 여기 없어." 그는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눈 채 방아쇠를 당기고, 무대에는 피가 흩뿌려진다.

  성공을 앞두고 왜, 의문스런 행동의 힌트는 직전 시퀀스인 공연 전날 밤에서 엿보인다. 평론가에게 폭언을 들은 그가 독한 술을 마시며 길을 걸을 때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대사를 읊조리는 노숙자가 보인다. "인생은 걸어다니는 그림자이다. 무대에서 잠시 거들먹거리고 종종거리며 돌아다니지만, 얼마 안 가 잊히고 마는 불행한 배우일 뿐이다." 리건은 연극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으려 했지만, 배우는 잠깐 현상하는 무대 위 존재일 뿐이다. 2막 공연에 들어서기 전 그는 전처에게 말한다. "샘에겐 아빠가 필요한데, 알몸으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놈팡이만 있지." "사랑해"라고 그가 건네는 말은 평생 갈망했던 사랑이 영화에도 연극에도 없다는 통렬한 깨달음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의 성찰은 무대 위에 올라야 한다. 그에게 무대는 꿈꿨던 공간 정도가 아니다. 무대 뒷편이 자아를 탐색하는 공간이라면 그에게 연극 무대는 자아를 상연하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리건이 무대에 서는 순간엔 버드맨이 보이지 않는다. 시끄러운 드럼소리도 없다. 관객들은 그가 어렵게 찾은 진짜 자아를 사랑해줄까. 카메라는 쓰러진 그의 시점에 서서 관객석을 비춘다. 관객 모두는 일어나 박수를 치고 있다.

  P.S.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두고 다양한 해석이 있다. 얼굴에 총을 쏜 결과 코가 무너진 리건이 병원에서 깨어난다. 평론가마저 '초사실주의'라는 말로 극찬했다며 동료와 가족들은 그의 성공에 기쁜 모습이지만 리건은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진다. 깜짝 놀라며 창 밖으로 얼굴을 내민 샘의 표정은 이상하게도 어둡지 않다. 오히려 잠깐 시선을 아래로 향한 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는다. 리건은 죽었을까. 정말 초능력이 있어 공중에 부양했을까. 이 모든 것이 리건의 상상은 아닐까. 혹 연극 무대에서 그는 이미 죽었고 투신 장면은 감독이 꾸는 꿈이 아닐까.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다는 것이 이냐리투의 생각일 거라고 나는 짐작한다. 어떤 가설을 대입해봐도 나름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리건이 살아난 것 같은 장면을 굳이 집어넣은 이유가 궁금하다. 당장 떠오르는 건, "(에드가) 입에 총을 집어넣고 쐈다면서 어떻게 살아났지"라는 연극 속 멜의 대사다. 자살 시도는 에드가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는 방법이었다. 리건은 관객 앞에서 자신을 증명했지만 딸과의 관계는 해소하지 못했다. 그는 두 번 죽어야 한다.
https://youtu.be/dwLI_Dozq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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